2006. 12. 19.

Agile은 날쌔다.

Agile은 機敏하지 않다.

제발 바라건대, 남의 말을 가져다 모두가 같이 쉽게 쓰고자 우리말로 옮기는 것을, 남의 말보다 더 어려운 말로 옮기는 바람에, 다시 사전을 뒤적거리게 만드는 어리석은 짓 좀 그만하자. 정 그리 못하겠거든 차라리 소리나는 대로 '에자일'이라고 써라. 그게 훨씬 낫다.

Agile이란 말을 기민(機敏)한 이라고 처음 옮겨 쓴 사람에게는 참 미안한 얘기지만, 우리가 자꾸 이러면 안된다. 나라 사랑하자는 마음에서 '우리말을 사랑하자'고 외치는 게 아니다. 그냥, 말과 글 좀 쉽게 쓰자는 소리다.

우리는 자꾸 일부러 어려운 말을 골라 쓰는 나쁜 버릇에 길들여져 있다. 수천년 동안 중국말, 한자를 써서 배움을 쌓아온 탓인지, 그냥 말하거나 글 쓸 때는 곧잘 쉬운 말을 쓰다가도, 꼭 책, 논문, 기사 같이, 정식으로 글 적을 때가 되면, 조상 대대로 찰거머리 같은 중국 귀신이 붙어서 그런 것인지, 꼭 어려운 말만 골라쓴다.

내가 이리 말하면 무슨 말로 되받아 칠지 나도 잘 안다. 어디 한두번 그런 일로 티격태격 했겠는가? 우리말에서 모든 한자말을 걷어낼 수는 없다. 억지스럽게 꼭 우리말만 쓰자는 고집부리는 게 아니다. (그게 어디 말이나 될 법한 소리인가.) 나도 그쯤은 알고 있다. 또 우리가 오랫동안 한자말로 지식을 정리해온 탓에, 토박이 우리말만 가지고는 도저히 어찌 나타낼 수 없는 뜻이 있다는 것도 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새롭게 들어오는 바깥 지식을 고스란히 한자로만 옮겨 적는다면, 그게 오롯이 우리 배움이 되겠는가? 남의 말을 우리 말로 옮겨 쓰는 까닭은, 남이 아는 것을 나도 알고 우리에게도 쉽고 바르게 알리려고 하기 때문이 아닌가? 그렇다면 도데체 쉬운 말을 버젓이 놔두고서 일부러 어려운 한자말을 찾아쓰거나 만들어쓰려는 것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가? 다시 말하건대, 그런 버릇은 앞서간 선배들이 물려준 참말 나쁜 버릇이다. 그러니 괜한 딴지 부리지 말고, 가만히 앉아서 내 얘기 좀 들어보라.

Agile이 그렇게나 어려운 뜻이라서 '機敏스럽기'까지 한 말인지 생각 좀 해보자.

네이버에 있는 영영사전으로 agile을 찾아보면 맨 첫 줄이 이러하다.

Someone who is agile can move quickly and easily.

딱 보면 알다시피, 조금도 어렵게 옮겨 쓸 말이 아니다. 그냥 '잽싸다', '재빠르다', '날쌔다', '날래다' 가운데 아무 말로나 옮겨 써도 된다. (나는 이 가운데 '날쌔다'란 낱말이 가장 마음에 든다.)

agile
1 (동작이) 기민[민첩]한, 재빠른
2 머리 회전이 빠른, 예민한
3 생기발랄한

이 사전 만든 사람들도 참 한심한 것이 맨 첫줄에 '機敏한', '敏捷한'부터 떡 하니 올려 놓았다. 이러니 사람들이 (자신이 없을 때는 더더욱) 어려운 말을 골라서 쓴다. '재빠른'이라고 옮기면 쉽다는 것을 알면서도, 듣는 사람들이 뭔 소리나 하지 않을까 걱정이 되어, 쉬운말을 더 안쓰려고 한다. 어려운 한자말로 옮겨 놓으면, 딱 들어보고 그 뜻을 바로 알아듣지 못하기 때문에, 따지고 드는 사람이 많지 않다. (내 말이 거짓인지 어디 실험 한 번 해봐라. 쉬운 말을 쓰면 딴지 거는 사람이 훨씬 더 많다.)

옛날에 우리는 어려운 한자 말을 섞어 쓰면, 곧 잘 '문자쓰네~'라며 놀려댔던 적이있다. 배웠다는 티내지 말란 소리다. 한데, 그런 놀림 속에는 '한자말은 배운 사람이 쓰는 말'이라는 마음이 몰래 깔려있다. 그래서 꼭 보면, 어려운 말을 썼을 때보다 쉬운 말을 썼을 때, 품격이 느껴지질 않는다느니, 우리말에는 깊은 뜻을 담을 수 없다느니, 드물게는, 우리말이 더 어렵다느니하며 억지를 부리른 사람마저 나온다.

'機敏한'에 무에 그리 더 깊은 뜻이 담겨있는가? 오로지 들어서 뜻을 깨칠 수 없으니, '기민'이란 소리에 agile이 품은 뜻을 억지로 집어넣어서, 새로운 낱말을 만들어 쓰려는 것일 뿐이다. 솔직히 말해보라. '기민'이라는 소리를 들었을 때, 틀 機 빠를 敏이라는 한자를 떠올리며 뜻을 되새기는가? )(중국 사람들도 그렇게 알아듣지 않는다. 낱말은 뜻으로 만들어 내되, 만든 다음에 귀에 익고 손에 익으며 그저 소리를 듣고 뜻을 떠올린다.)

'잽싼','재빠른'이라고 쉬운 말을 쓴다고 해서 누가 뭐라 하지 않는다. 아직도, 중국에서 우리에게 事大를 하지 않는다고 멀쩡한 처녀들을 잡아다 바치라고 할까 걱정이 되는가?

그나마 제 정신으로 만든 우리말 사전 가운데 하나, 한글학회 사전에서 기민하다를 찾아보라.

기민-하다[機敏--]
= 재빠르다.

다시 말하건대, 남의 말을 가져다 우리말로 옮겨 쓰는 까닭은, 모두가 쉽게 알아듣는 말로 좋은 배움을 다같이 나누려고 하는 짓이다. 한데, 옮기려는 말보다 옮겨 놓은 말이 더 어려우면 도데체 왜 그런 바보짓을 하는가? Agile이란 말 뜻을 보려고 영어사전을 뒤지는 대신에, 도리어 機敏이란 한자말 뜻을 찾아보려고 국어사전, 한자사전을 뒤지는게 멍청한 짓 아니고 뭔가? 미친개 잡자고 호랑이를 불러들이는 멍청한 짓 좀 말자. 차라리 소리나는 대로 '에자일'이라고 써라. 그러면 영어 낱말이라도 하나 더 외우게나 되지.

Agile은 날쌔다. 또 날래기도 하고 잽쌀 수도 있다. 허나 機敏하지는 않다. 왜냐하면 우리말 소리, 기민에는 아무런 느낌도 뜻도 없기 때문이다.

댓글 11개:

익명 :

우현히 맥커뮤니티 언저리에서 눈에 익은 ID인 듯 하여 블로그를 방문하게 되었답니다.

Agile Programming은 "날쌘 셈말쓰기"쯤이 되나요? 이 역시 사전이 필요한 것은 마찬가지일 듯 합니다만...

잘은 모르겠지만 기민이라고 번역한 사람도 비슷한 당혹스러운 상황에 처하지 않았으나 추측해 봅니다. 날쌔다는 직접적 표현보다는 한자어인 기민이 이런 개념적인 의미를 담기에 훨씬 유연성이 있을 수도 있을 테니까요!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Kizoo :

Programming을 '셈말 쓰기'로 옮기는 일은, 벌써 지나친 일이 아닐까 합니다. 또한, Agile Programming을 '날쎈 셈말쓰기'로 옮기는 것도 좋지 않다고 봅니다. 왜냐면 agile 프로그래밍은 그냥 프로그램 짜는 것만 뜻하는 말이 아니라, 소프트웨어를 만드는 일을 어떻게 하면 더 좋을 까 하는 '일하는 방법'을 일커든 말이니까요.

어쨌거나, 제 생각은 agile programming을 '기민한 프로그래밍'이라고 옮기더라도 아무 것도 나아질게 없고, 한자어 기민에 '날쌔다"나 "잽싸다"는 뜻 보다 더 깊은 뜻이 담겨 있을 거라는 생각부터가 틀렸다고 봅니다.

더 나은 말을 찾지 못할 거라면, 그냥 에자일 프로그래밍이라고 소리나는 대로 쓰는게 더 옳다는 생각입니다.

Ahn, Ki Yung :

김재우 교수님 SICP번역본에 중요한 페이지가 한장 번역되지 않고 빠져 있는 것을 발견하고 깜짝 놀라서 이곳에 꼬리말을 남깁니다.

책의 겉표지 속표지를 넘기고 출판사 정보 등이 오는 바로 다음 페이지, 그러니까 목차가 나오기 바로 전에 있는 짧은 글입니다. Alan J. Perils 의 말을 인용하며 이 책을 컴퓨터 안에 살아 숨쉬는, 존경해 마지 않는 영혼들에게 이 책을 바친다는 내용입니다.

http://mitpress.mit.edu/sicp/full-text/book/book-Z-H-3.html

참 감동적인 글인데, 번역본에 빠져 있는 것 같아 아쉬웠습니다. 혹시 제가 제대로 찾지 못한 것이라면 몇 페이지에서 찾을 수 있는지 알려 주시고, 미처 번역본에 넣지 못했다면 이곳과 인사이트 스프링노트에 올려서 독자들이 꼭 읽을 수 있게 했으면 좋겠습니다.

Kizoo :

오래 전에 옮겨쓴 적이 있는 글인듯 한데,어찌 우리말 판에는 안보이네요. 출판사에 알아보고 빠졌다면 온라인으로라도 읽어 볼 수 있도록 보태겠습니다.

고맙습니다.

익명 :

애자일 방법론이 단지 재빠르게 개발을 진행하기 위한 방법론만은 아닐텐데요. 애자일하기 위해서는 사전에 많은 준비가 되어있어야 하고, 개발자도 스스로 스마트하도록 노력해야 하며, 프로젝트 진행 중에도 끊이없이 회고하고, 리뷰하고, 수정하고, 협업해 나가야 성공할 수 있는 방법론으로 알고 있는데, 단순히 '날쌔다'라고 번역하기에는 뭔가 많은게 빠져있다는 생각이 드는군요. 반면 역시 딱 맞아떨어지는 것은 아니지만 '기민함'이라는 단어에서는 smart하다는 뜻도 풍겨나지 않나요?

Kizoo :

날쌔다, 날래다, 재빠르다, 잽싸다 따위 어떤 말로도 도저리 Agile이란 말뜻을 온전히 못 옮겨 담는다 싶다면, 그저 소리 나는 대로 에(애)자일이라 쓰면 됩니다.

하지만, "기민한"이나 "민첩한"이란 낱말이 "날쌘"이나 "재빠른"이란 말 보다 더 깊은 뜻을 품고 있다고는 생각지 않습니다. 똑 같은 뜻을 품고 있는 두 낱말이 있을 때, 한자말이 더 깊은 뜻이 든 것처럼 여겨지는 경우가 더러 있는 까닭은 오랫동안 우리 머리 속에 억지로 만들어낸 한자말은 높고 깊은 말이고, 절로 우러나온 우리 토박이말은 낮고 얕은 말이라는 생각이 버릇처럼 또아리를 틀고 있기때문이입니다. 한자말은 소리만 들어서 뜻이 가슴에 칼날같이 와닿지 않기에 꼭 낱글자로 뜻풀이를 해야 그나마 두리뭉실하게라도 뜻이 와닿는 때가 적지 않지요. 이런 한자말은 보통 우리말이 되지 못한, 그러니까 우리말이라고 하기 힘든 그런 말인 때가 아주 많습니다.

그나저나, 본디 소프트웨어란 것이 어디 재빠르게 만들 수나 있답니까. 날쌔게 째빠르게 일을 하려면 물건을 만드는 이나, 일을 다스리는 이나 모두, 언제나 고장나고 고치고 다듬고를 되풀이 하면서, 늑장 부리다 작은 병을 크게 키우지 않도록 애쓰고 또 애써야 제대로 된 물건을 만들 수 있습니다. 여태 많은 이들이 이런 저런 방법을 내세워 소프트웨어란 물건을 어떻게 만드는 게 좋은지 줄기차게 떠들어 왔지만 생각만큼 잘 안되었지요.

그러니 소프트웨어란 물건을 잽싸고 날쌔게 만드는 방법이 참말 있다면 배워서 써볼만한 게 아니겠습니까?

익명 :

기민에 더 깊은 뜻이 있고 없고는 혼자 깊이 생각한다고 알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생각하면 그런거죠. 결국 언어는 의사소통이 목적이니까요.

읽다보면 기민에 더 깊은 뜻이 없다라는 말인지 있으면 안된다는 말인지 혼동이 오네요. 저 역시 기민하다라는 말에선 재빠르다는 의미 외에 날카로운 판단력 같은 것도 포함되는 것처럼 생각되거든요. 이렇게 한자어에 더 많은 의미를 두는 저에게도 문제가 있는건가요.

본문을 보면 agile이라는 단어 뜻이 1,2,3,4 이렇게 나열돼 있는데 정상적인 사전이라면 당연히 제일 연관성 높은걸 첫번째로 놓는게 아닌가 생각됩니다. 1번이 기민한으로 돼있다니 이런 사대주의, 문자 쓰는 놈들 하는건 왠지 열등감 가득한 페미니스트가 현모양처라는 말만 들어도 가부장 어쩌며 열을 내는 것 같은 현상으로 생각되네요.

Kizoo :

말과 글은 뜻을 나누고자 씁니다.
따라서, 쉬운 것을 어렵게 말해야 할 까닭이 없습니다.
더구나, 어려운 글자를 쓴다고 뜻이 깊어지는 것은 더더욱 아닙니다.

중국에서 들어온 한자말과 글이 어려운 것이 누구나가 다 아는 사실입니다.

나는 한자말이 더 마음에 들어서 쓴다는 것을 제가 뭘 어찌하겠습니까만, 어려운 것을 더 쉽게 고쳐 쓰지는 못할 말정, 어려운 말을 정확한 근거도 없이 더 어렵게 만들어 쓰는 것을 따지고 든 것 뿐입니다.

저는 중국에서 들어온 한자말보다는 영어를 차라리 쓰겠습니다. 중국 문화를 열심히 공부하면서 중국의 말과 글과 문화가 여기에 수도 없이 들어왔습니다. 지금은 영어가 그렇습니다.

그런데 참 놀랍게도 중국말은 곧이 곧대로 받아들이며 쓰던 사람들이, 영어는 더 정확하기도 더 쉽지도 않은 중국말로 옮겨쓰려면서 "우리말로 옮겨썼다"는 표현을 하는 모순을 따지고 들었을 뿐입니다.

말은 정확하거나 아니면 쉬워야 합니다. 그나저나 "기민"이라는 말을 우린 국어 무슨 표준 협회에서 Agile의 공식 번역어로 지정하기라도 했나요?

"기민 제조 공정"이라는 말을 영어로 옮겨 놓고 써보시죠. 실제로 쓰는 말입니다. 바람직한 것은 둘째치고 도데체 무슨 뜻인지 몇 사람이나 알아 듣나요?

Magicboy :

현업에서는 그냥 Agile 그대로 사용합니다. 그게 윗분들(-_-;)에게 발표할때 편하기 때문인데요..

'낼쌘 방법론'을 사용해서 이번 과제를 진행하겠습니다~ 라고 발표하면. . . 서로간에 좀 민망할 듯 싶습니다..
(이런걸 민망해하지 않아야할 것 같지만.. 아무래도 이상은 멀고 밥줄은 바로 눈앞에 있으니 말입니다 ㅜㅜ )

김재우 :

내 우리 현실은 이미 돌이키기는 어렵습니다. 저만해도 그렇게 쓰지 않습니다. 다만 그런 생각을 마음 속에 품고 사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고 생각합니다. 기름과 거뿜을 뺀 본 뜻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눈을 가지고 있는 것만으로도 여러 가지 일에 도움이 된다는 것을 요사이 더 많이 느끼게 됩니다.

사실, "agile을 날쌔다"라는 글 제목은 정말 그리 쓰자는 것이 아니라, 글 속에 담긴 뜻을 더 강하게 드러낸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익명 :

한자교육에 대한 문제이군요. 한자를 그저 중국문자로만 생각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한자를 우리민족이 쓴 기간을 보면, 아마 다른 민족 (예를 들어 일본)같으면 우리문자라고 주장을 하고도 남을 문자입니다.
한자의 우수성을 이야기하려고 하는 것은 아닙니다만, 저는 취미삼아 컴퓨터언어를 찔러보면서 (저는 프로그래머가 아닙니다.) 한자의 장점을 발견하였습니다. 사용하기는 어렵지만, 일단 사용하는 사람이 사용할 정도의 수준이 되면 "추상화"의 정수를 보여줄 수 있는 문자입니다. ("추상화"도 한자어이군요...) 주인장님이 한자어의 어려움을 예를 드신 것을 보면 한자어를 한자로 쓰지 않고 한글로만 쓰거나 한자어로 써도 그 한자의 뜻을 모르기 때문에 일어나는 경우 같습니다. 한자교육이 강제화가 아니니 그 말씀이 맞기는 합니다. 그러나 글에서와 같이 한자어를 사용하는 것이 무조건 잘 못 된것 같지는 않습니다. 단, 일본식 한자어는 저도 무조건 반대합니다. 기술서적에 나온 한자어는 사실 많은 것이 영어등의 서적을 우리나라말로 번역시 일본번역판에 나온 단어를 그대로 사용한 예가 많습니다. 그 단어는 한자어가 아니라 한자로 되어 있더라도 일본어입니다. 아무튼...번역하신 SICP 잘 보고 있습니다.